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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연의 시- 당대의 시인

by 청송백학 2024. 3. 16.

맹호연(孟浩然, 689년~740년)은 성당(盛唐)시절의 자연주의파 시인이다.

당나라는 시문학(詩文學)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의 형식과 장르에서

그 어느 왕조에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문체와 형식인 변려체 문장의 전성기였다

성당시절은 시문학의 전성기였다.많은 시인이 배출되었고 뛰어나고, 걸출한 시인들이

등단하였기 때문이다.

맹호연은 당대의 유명한 이백, 두보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왕유(王維)와 왕창령(王昌齡)같은 시인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맹호연은 호북성 양양(襄陽)출신으로 그의 용모는 말쑥하며 신체가 좋았다고 한다.

맹호연의 이름은 호이다,자가 호연이다. 그래서 맹호연이라고 불리워졌다.

맹호연은 벗을 사귐에도 사소한 일에 구애를 받지 않는 호방한 성격이라고 한다.

맹호연은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며 살다가 40세의 늦은 나이에 진사시를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그때 장안에서 왕유와 왕창령을 만나 교류하였다.

비록 진사시에서 낙방하였으나 환회(韓會)가 맹호연의 재주를 안타까이 여겨 황제에게 천거

하였다. 황제를 알현하기로 하였으나 친구가 찾아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조정에 가지

았았다. 또 한번은 왕유가 금란전에서 맹호연을 불러 시문을 논하였는데 황제(당 현종)가

와서 맹호연을 접견하고 시를 읊어보라고 명하자 맹호연은 「세모귀남산시(歲暮歸南山詩」

를 읊었는데 "제주없으면 明主도 버리고, 병이 많으니 친구도 멀어지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황제가 불쾌히 여겨 " 경이 스스로 짐에게 구하지 않았을 뿐, 짐은 경을 버리지 않았네"

그를 도성에서 내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 일화들을 보면 맹호연은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맹호연은 다시 녹문산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녹문산으로 돌아가는 밤에 부르는 노래
夜歸鹿門山歌

산사의 종소리 울릴 제 날은 이미 저물녘
어랑 나루터는 배 타려는 나그네들의 더들썩한 소리 
사람들은 모랫길 따라 강촌으로 향하고
나 또한 배타고 녹문산으로 돌아간다
녹문산의 밝은 달은 안개 서린 나무를 비추는데
어느새 방공이 숨어살던 곳에 이르렀네
바위 문과 솔 길은 오래도록 고요한데
오직 은자만이 절로 왔다 갔다 거닌다

 

맹호연아 고향 녹문산으로 들어 오면서 지은 시이다.

맹호연이 녹문산에 은거함으로 인해 생긴 말로 녹문산은 은거의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방공이라 함은 방덕을 말한다. 은자는 자신과 방덕공을 지칭한다.

맹호연은 매화를 참으로 좋아하였단다. 그의 매화사랑은 유별나서 해마다 2월(양력3월)이 되면

가장 먼저 핀 매화를 찾아 나선다고 한다. 그는 먼저 핀 매화를 찾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장안 동쪽

을 흐르는 파수(灞水)에 놓인 다리, 파교(灞橋)를 건너 매화를 찾아 나선 일화가 있다.

맹호연의 주옥같은 시가 시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다보니 시흥을 돋우는데 당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나서는 맹호연의 모습으로 시흥을 돋우웠다고 한다.

정작 맹호연이 지은 시가 매화찾아 나서는 일화로 시인들이 시흥을 돋우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었다.

역시 매화하면 맹호연을 떠 올린다.

그러나 맹호연을 나타내어 그린것이지 맹호연이 직접 시를 짓거나 한 것은 아니다

맹호연의 다른 시를 소개해 본다.

 

봄 새벽(春曉)

봄 잠에 새벽을 느끼지 못하는데
여기저기서 새 소리 들려온다
간밤에 비바람 소리 사나웠으니
꽃은 얼마나 떨어 졌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