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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 정리 후기

by 청송백학 2024. 2. 15.

최북의 산수도

당송팔대가를 정리하여 올리고 나서 든 생각이다.

또한 모아서 한 번에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작성하였다

작은 소회라고 할까, 워낙 당시를 좋아하였다. 당시는 책이 두권이 있고 송시는 한 권이 있다.

당시(唐詩) 중 한권은 너무 많이 읽어 양장본인 책이 다 닳았다.

송시는 읽은 부분은 읽고 아직 읽지 않은 시들도 있다. 당시 책을 읽으며 한유, 유종원, 장적,

유우석, 원진 등은 시가 몇수가 수록 되지 않았다.

이번에 정리하면서 안 사실이다. 이분들은 기존의 '변려문(駢儷文)'를 지양하고 고문체인 산문

문장을 사용하였다.

당송팔대가 한유, 유종원, 소식(소동파), 소철, 소순, 구양수, 증공, 왕안석은 모두 고문연구를 

하였고 또한 고문운동을 전개했다. 역시 시도 고문체의 산문시를 지었다.

또한 다양한 산문으로 기행문, 소설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대구나 운율을 맞추고 아름다운 시어를 사용하는 것을 지양하였다.

하여 당시(唐詩)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유, 유종원, 장적, 유우석등의  시가 잘 읽혀지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시의 대우와 대구, 아름다운 시어로 지은 것이기에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당나라를 크게 시대를 나누어 본다.

전당시대, 성당시대, 중당시개, 만당시대로 나누어 생각해본다 면,

전당시대는 수나라가 무너지는 말년에 농민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당을 세우기 까지라고 보며

성당(盛唐)시대란 현무문의 난으로 당나라를 이은 이세민통치에서 안정기로 들어 간 때 부터라고

생각한다. 이시기가 당나라가 가장 번성하였고 정치.문화. 외교 등으로 발전되던 시기이다.

외교적으로 당나라의 영토확장과 해양으로 진출한 시기이다

또한 문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한 시기이다 

전당시대와 성당시대는 당나라 건국 후 약 120년간 지속되었다.

중당시기는 약 80년간으로 이시기는 다시 번진들로 인하여 나라가 분열 될 조짐을 보이고,

번진의 난이 끓임없이 일어났다.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이다

만당시기는 번진의난을 제압하는데 국력이 소모되고 있었고 백성들은 전란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시기의 시인들은 슬프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신세한탄을 하는 시를 지었다.

한유, 유종원은 중당시기의 문인이다. 특히 한유는 번진토벌에 참여하며 벼슬의 길을 다졌다

유종원은 당나라의 개혁에 참가하여 개혁을 주도한 세력들이 화를 당할 때 사형은 면하고

지방으로 좌천당했다. 개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사형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유종원은 좌천되어 다시는 중앙으로 돌아 오지 못하였다.

개혁을 시도한 당 순종은 6개월여만에 황위를 선위하였고 헌종이 제위에 올랐던 시기이다.

819년 헌종이 사망하고 목종이 즉위하였다. 목종 재위기간에 한유는 이부시랑 등 중앙관리

로 승승장구하였다. 한유는 중앙에서 개혁의 바람이 일어 날 때, 번진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화를 면했다.

824년 목종의 사망으로 경종이 즉위하고 그해 한유는 사망하였다.

유종원은 지방으로 좌천된 후, 호주책사, 영주사마, 유주사마 등을 지냈다

819년 유주에서 향년47세로 사망하였다. 짧고 고독한 삶이었다.

한유는 수필과 시, 기행문을 남겼다. 남겼다

당나라는 한유와 유종원이 사망 후, 다시 문체는 변려문으로 바뀌었다.

송나라는 북송시대와 남송으로 나누어 진다

북송시대는 송나라의 전성시대이다 문인의 활동도 활발하였으며 이때는

언간의제도가 활발히 이루어져 사실은 왕권이 약해졌다고 해야 할것이다

모든 것이 언간들의 신,구세력으로 인하여 파당으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송대의 문학은 당나라에서 시작하였던 고문운동이 당송팔대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시행되어 조정에 올리는 상소 등에도 고문형식을 따랐다.

특히 고문연구에 매진한 사람이 구양수, 소식이었다.

당.송대의 문인들이 모두 고문운동과 더불어 고문체를 적극 사용하였다.

정리를 아래와 같이 요약 해 보았다.

1. 시대적, 사회적 배경

◎ 시대적 배경

당나라 : 중당시대, 덕종. 순종. 헌종.목종. 경종 

송나라 : 북송시대, 인종, 영종, 신종, 철종, 휘종

◎ 사회적 배경

당나라 : 초기 당을 건립 후 각 지역에 번진을 두었다.

당나라는 외교에 뛰어나 많은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으며 해상무역이 발달하여

국가는 부강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번진의 세력이 강하여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고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 났다. 중당시정에는 번진을 소탕하기

위하여 중앙전부에서 많은 국력이 소모되었다.

당헌종이 제위에 오르고 나서 번진을 제압하며 다시 힘있는 당의 면모를 보이려고 

헌종은 노력하였다. 헌종의 노력으로 번진들의 난도 어느정도 조용하였다.

그러나 헌종사후에는 다시 번진들이 일어나 난을 일으키고 결국 나라는 분열되어 

망하고 이때를 만당의 시기라 한다. 안사의 난이 멸망의 도화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당나라는 멸망하고 5대 10국으로 분열되었다. 

송나라 : 송나라(960년 ~ 1279년)는 북송시대(960~1126)와 남송시대(1127~1279년소황제까지)이다

북송시대는 송나라의 전승기다. 수도는 개봉이다. 남송시대는 송나라의 쇠퇴기에 해당한다 수도는 임안

(지금의 항주)이다

송나라는조광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조광윤은 후주절도사로 난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정하였다가

얼떨결에 황위에 오른 사람이다.유명한 말이다 술한잔에 황위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광윤은 그렇게 황위에 오르며 당멸망 후 분열된 중국 5대10국을 제압하고 다시 통일중국을 이루었다.

송대는 언관제도를 도입하고 문인을 많이 등용하여 문치주의를 이루었으며, 당대의 번진의 난 등으로

국가위기를 경험하였기에 무인들을 경시하고 견제하였다.

해마다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문인관료들이 늘어나 종국에는 국가제정이 파탄 날 위기에 이르렀다.

이 배경은 전 왕조 당나라가 환관들에 의해 좌,우지됨으로 백성들의 삶과 관료들이 올리는 상소와

정책 등이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차단되어 국가를 쇠퇴하게 하였고 분열하게 하였으며

환관들은 황제와 관료들의 소통창구를 막아버렸다.

무인들 즉 번진들의 힘이 강해져 멸망에 이른 것을 알기에 송태조 조광윤은 이를 경계하고 무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환관의 힘이 크지지 않도록 견제하였으며  문인들을 양성하기 위한 과거제도

확대시행하고 언관제도를 도입하여 서로 견제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결과 왕권은 약해지고 국론은

분열되었으며, 정책은 몇차레의 개혁정책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 학문적 배경

◎ 당나라 

당나라는 시문학이 발달하였다. 많은 시인들이 탄생하였으며 아름다운 시의 셰계를 열었다.

그러나 당대의 시는 너무 규율에 얽매어 일반백성들은 시를 논하기고 짓기도 어려웠다.

변려문체라는 형식으로 대위,대구에 치중하였으며 지나치게 아름다운 시어를 사용하여 감정을

표현하였다. 조정에서 작성하는 문서나 상소등도 변려체에 치중하므로 결국 내용보다 문체에

그 의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중당(中唐)시대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에 의하여 연구되고 시행되었던 고문운동

으로 당의 문인들이 사용하던 기존의 변려문체가 아닌 고문(古文)문체인 산문으로 시를 짓고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조정에 올린문서들은 어쩔수 없이 변려체를 사용하였다.

한유와 한유의 문하에 있던 문인들과 유종원의 사후 다시 변려문체를 사용하였다.

◎ 송나라 

송(宋)대는 당송팔대가에 속하는 소식(소동파), 소철, 소순, 증공, 구양수, 왕안석 등에 의해 고문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소식과 구양수는 고문연구에 매진하였으며, 많은 산문과 기행문, 수필 등을

남겼다. 또한 조정에 올리는 정책이나 문서도 산문형식을 따랐다. 고문연구와 고움운동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시를 재평가하고 탐미하기도 하였다.

3. 사상

◎ 당나라 

불교를 숭상하였고 유교도리를 따랐다. 민간과 여성들은 불교를 믿었다.

한유는 불교를 배척하였고 유교신봉자였다. 당 신종 때의 일화로 신종(神宗)이 불사리를 궁으로 모셔와

봉안 하려하자 한유는 그것을 비난하며 불교는 종교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좌천 당하였다.

유종원은 포용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의 도리를 다 한다면, 불교든 도교든 괜찮다고 하였다

◎ 송나라 

송나라는 유교.불교. 도교를 모두 믿었다. 송대는 도교사상이 민간에 많이 알려졌다.

소식은 지방으로 전전하고 귀향가 있는 동안 도교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4. 생애(生涯) 및 업적(業績)

◎ 생애

_ 한유(韓愈) 

한유는 문장가, 정치인, 문장가, 사상가였다

한유는 한마디로 외골수였다. 어릴때부터 문장력이 뛰어나 문재로 불렸으나 조실부모하고

형의 손에 키워졌으나 형 또한  사망하여 형수의 손에 자랐다. 과거 시험에 세번이나 낙방하고 4번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부(吏部)시험에 실패하고 796년(덕종, 연호정원12년)에 변주의 선무절도사 동진(董晉)

등의 추천으로 28세에 관직에 오를수 있었다. 당시의 관직이 비서성 교서랑이었다. 동진을 따라 선무난을 

평정하는 데 감찰추관으로 부임하였다. 동진사후 예부낭중, 형부시랑, 조주자사, 국자제주(국자감학장))

이부시랑, 경조윤 겸 어사대부, 병부시랑등을 역임하였다. 이부시랑의 역임기간이 길어 한이부(韓吏部)

라 불리기도 했다. 824년( 목종, 장경4년) 장안의 자택에서 56세의 나이로 졸(拙)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여 한유사후에 예부상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로 문(文)을 받아문공(文公)이 되었다

 _ 유종원(柳宗元) 

당나라 문장가이자 시인이다.개혁정치의 희생자다.

자는 자후(子厚)이다.순종제위시 유우석, 왕숙문, 왕비 등과 함께 순종의 정치개혁에 참여하였다가

헌종제위시 사형은 면했으나 지방의 좌천되어 평생을 지방으로 전전하다 47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평생을 외로운 삶을 살았다. 유종원의 전왕조의 귀족이었으며, 시험에 낙방하는 일 없이 시험마다

바로 합격한 인재다. 한유와는 그런면에서 완전 달랐다. 그러나 결국 황제의 개혁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외롭게 지방관으로 살다 죽었다.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고문연구와 고문운동을 하였으며 산문으로 기행문과 수필 시등을 썼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포용적이었다. 성격이 유슌하고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덕종제위시절 괸직에 나아가 순종제위 6개월여만에 헌종제위로 죽음은 면하고 영주사마(永州司馬)

로 좌천되었으며 43세때 유주사마(柳州司馬)를 끝으로 47세에 졸하였다.

유종원은 유주에서 오래 임직하여 유유주(柳柳州)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조상이 하동(河東)사람

이어서 유하동(柳河東)이라 불리고 하동선생(河東先生)으로 불리었다. 합리적인 인재가 한 순간의

선택으로 평생을 불운한 삶을 살았다. 아마도 견딜 수 있었던 마음가짐은 그의 가문의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_ 소식(蘇軾) 

소식은 북송시대 문인집안 출신이다. 북송의 신종, 철종, 휘종대 사람이다. 부친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한 집안에 3명이 당송팔대가에 등재 되었다. 자는 자첨, 호는 동파로 불리웠다. 동파거사, 또는 소동파로

불리웠다. 소식은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의 상을 받고 상경하였으나 곧 아내와 부친의 상을 

받았다. 여러 사유로 33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관직에 입문하였다. 이때가 송 신종의 시대로 들어가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될 때였다. 막 시행된 신법이 구법다과의 대립이 시작 될 때이다. 서로 집권과 배척

을 반복하던 시기다 소식은 신법파도 구법파도 아닌 중도파였다. 그럼에도 조정장악에 따라 이용 당하며 

귀양과 좌천이 거듭되었다. 일반적으로 소식을 구법당으로 보았으나 소식은 완전한 구법당도 그렇다고

신법 지지자도 아니었다. 소식은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각 부임지에서 백성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임안(항주)지사로 근무하면서 임안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지금의 동파육이 탄생했다

어디에서나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신종사후에 구법당이 집권하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예부상서가 되었으나 역시 정권에 이용만 당하였고

결국 다시 유배를 갔다. 소식은 해남에서 학당을 세워 교육을 시켰고 해남최초로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으나 소식은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도교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자도 소식의 시를 좋아하였다. 

소식은 오래도록  유배생활을 하였고 신종이 죽고 휘종이 즉위하자 소식을 사면하고 중앙으로 복귀시켰다.

소식은 개봉으로 상경 도중에 44세의 나이로 병으로 객사하였다.

소식 사후 26년 뒤 송 고종이 소식을 <태사>로 추종하고, 송 효종시기에 <문충>의 시호를 내렸다

송 고종과 송효종은 남송의 황제이다 그러니 이미 북송시대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것이다

소식은 시와 서화에도 뛰어 났으며  조정에 제안한 상소문의 뛰어난 문장력도 유명하다.

_ 소 철(蘇 轍)

소철은 형 소식, 부친소순과 더불어 모두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올렸다. 

소철은 북송시대 신종.철종.휘종시대의 관료였다. 소철은 부친이나 형 소식과는 달리 74세까지 향유하였다.

자는 자유(子由)이며, 호는 영빈(潁濱)이다. 사후에 태사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으로 받았다.

인종 가우2년에 형소식과 부친 소순과 상경하여 소식과 함께 구양수, 장방평의 인정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을 시작으로 낙양군사추관, 송 신종때는 삼사조례사촉관 등을 역임하였다.

형 소식과 달리 순탄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식도 신.구법파들의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소식은 신법인듯 신법이 아닌 중도파였다면, 동생은 구법파다. 신법이 득세하였을 때 하남성으로 좌천되었다

신종 사망 후 송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비서성 교서랑으로 임명되어 우사간, 역관 어사중승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였다. 소철은 철종의 인사문제를 거론하며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에 전한시대 소제(昭帝)가 무제(武帝)

의 법도를 바꾼일을 언급하여 '한 무제를 이전 정권에 비유하였다'라고 여겨 소철을 여주(하남성)로 좌천시켰다.

철종은 다시 책임을 물어 원주, 남경, 균주 등 다양한 지역으로 전보시켰다. 이후 다시 태중대부로 복직시켰으나

다시 허주로 좌천되었다, 다시 복직되었다. 허주 재임시 영빈유로(潁濱遺老)라는 호를 지어 각종 자서전을 집필

하였다. 10년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글을 쓰며 지내다 74세의 나이로 졸(拙)하였다.

사후에 단명전학사(端明殿學師)로 추관되었으며, 시호를 문정(文定)으로 받았다.

_ 소순(蘇洵)

소순 (1009년~1069년)은 북송시대의 학자, 관료, 문인이다 자는 명윤(明允)이며, 호는 노친(老泉)이다

소식과 소순의 아버지이다. 아들들과 함께 삼소(三蘇)라고 불린다 이중 소순은 노소(老蘇)라고 불렀다

소순은 어릴 때 그는 싫증을 장 느껴 학업에 열중하지 못하였다. 부친이 살아있고 집안을 부양 할 의무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말은 생활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결혼하여 딸들과 아들들을 낳았다.

그중 2명이 소식, 소철형제다. 그리고 딸들이 단명하였다. 모친이 사망하자 정신을 차리고 학문에 정진한 

만학도였다 공부를 시작한 후 1년만에 진사시에 응시 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소식은  공부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지 않고 더욱 학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학문 그자체를 위하여 학습

하였다. 소순의 노력은 소순을 문장대가로 만들었다.

인종, 가우2년에 두아들의 과거 응시를 위하여 함께 개봉으로상경하여 그동안 자신이 쓴 <기책(幾策)>

<권서(權書)>, <형론(衡論)> 등 22편의 문장을 구양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읽은 구양수는 소순의

뛰어 난 재능을 칭찬하며 당시 재상이었던 한기(韓琦)에게 소순을 천거하였다.한기 역시 소순의 문장에 

감탄하였다.이때 소순의 두 아들 소싯, 소철도 진사에 급제하여 소씨 집안은 유명해 졌다. 또한 많은 문인

들이 소순의 문장을 베꼈고 당시 사회의 문풍을 일으켰다. 인종, 가우5년에 패주(覇州) 문안현 주부로 임명

된 것을 시작으로 비서성 교서랑 등 다양한 벼슬을 지냈다.1066년 58세의 나이로 졸(拙)하였다.

처음 관직을 시작 할 때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를 집필하여 죽기직전 완성하였다.

_ 증공(曾鞏)

증공(1019년~1083년)은 북송시대 문장가로 산문가이다. 형제인 증조(曾肇), 증포(曾布), 증우(曾紆), 증굉(曾紘)

증협(曾協), 증돈(曾敦)과 더불어 남풍칠증(南豊七曾)을로 일컫는다. 이는 고향이 남풍이기 때문이다.

증공은 남풍선생(南豊先生)으로 불리워 졌다. 증공은 12세때 육론(六論)을 썼다. 1057년 소식, 소철 형제와

함께 과거에 합격한 인제다, 그 당시에 문풍에 일신(日新)하여 명성을 얻었다. 당시 나이 39세였다.

태평주(太平州) 사법참군을 거쳐 중앙에 들어가 편교사관서적(編校史館書籍, 국립도서관), 관각교감(館閣校勘),

집현교리(集賢校理), 영종실록검토관(英宗實錄檢討官) 등을 지냈다. 다시 월주(越州), 통주(通州)의 통판,

제주(齊州), 양주(襄州), 홍주(洪州), 복주(福州), 명주(明州), 박주(亳州) 등의 지주를 역임하였으며 각 부임지

마다 백성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여 바른 치적을 남겼다. 특히 제주(齊州)에서는 이임 때 백성들이 떠나지 못하

도록 교량을 폭파하는 일화가 있다.

증공이 판삼반원사(判三班院事)로 재직시 국가 재정 팽창 사태를 우려하여 반드시 경비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 송 인종은 그 의견을 적극 받아 들여 "오조(五朝)의 치적은 증공의 판단이 옳다."고 하며 증공을 사관수찬

(史館修撰)에 제수하였다.

증공은 1082년에 중서사인을 마지막으로 1083년 4월에 졸(拙)하였다. 증공, 소식, 소철도 개혁을 바라지만

강력한 개혁정책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증공의 산문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끈기있고 결실한 의론(議論)의

전개가 특징이다. 증공의 산문은 청대의 고문학자인 요내(姚乃)는 "증공은 능히 그 단점으로 하는 곳을 피해

어기지 않는다."라고 호평하였다.

_구양수(歐陽脩)

구양수(1007년~1072년)는북송시대 인종 ~ 신종때의 정치가, 시인, 문학자, 역사학자이다.

자는 영숙(永叔),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 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을 받았다.

구양수는 길주(吉州)의 여릉(廬陵)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사천성 지방관이었던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백부(수주의 추관)에게 가서 생활하여, 빈궁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여 정규교육은 받지 못

하고 독학하였다. 어려서 부터 당대(唐代)의 한유(韓愈)의 문장에 매력을 느껴 그 문장을 배웠다.

1023년 처음으로 수주(隨州) 향시(鄕試)에 참가 하엿지만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고는

이유로 실패했다. 1028년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주었고 서언은 구양수의 웅대한 문장

에 감탄해 구양수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 들였다. 1028년 그해 겨울 구양수는 서언과 함께 경사로 가서 춘계

국자감고시(春季國子監考試) 에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엿으며 가을에는 국학에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030년 23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고관으로 출세의 길이 열렸으나 그의 환경으로 인한 독립적인 사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관각교감(館閣校勘) 등을 역임하지만,1036년 경우3년 개혁파 범중엄을 월권하면서 까지

변호하여 당시 재상이었던 여이간에 의해 축출당하여 이능(夷陵)현령으로 좌천되었다.1034년 처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었고 1043년 인종은 언로를 확장하려고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를 지간원(知諫院)으로 삼았다

구양수는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 온다. 약10년의 지방근무 후 중앙으로 복귀해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 인종의 신임을 잃었고 1045년에는 비방을 받아 안휘성지사로 또 좌천된다.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중앙에 복귀하여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1054년 인종은 그의 노쇠한 모습을 측은히

여겨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했다. 1057년 권지례부공거(權知禮部貢擧)에 오르고 1058년 포증에 

이어 개봉부윤(開封府尹)에 오르고 과거를 감독해 소식, 소철을 발굴한다

구양수를 경계한 정적들은 구양수를 각종 모함과 끊임없이 구설수를 만들었지만 그는 경사에 머물며 <당서>의

편찬에 참여하고 한림학사겸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 으로 승진한다. 그후 추밀부사,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에 오르고 소순, 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지지했지만 실제 신법이 실시되었을 때는 청묘법

을 두고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가 되어 정계를 은퇴하였다.

은퇴 다음해인 1072년 은둔생활을 하면서 안휘성 영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는 66세로 천명을 다 했고 2년 후 

조정에서 그에게 시호로 문충(文忠)을 내렸다.

_ 왕안석(王安石) 

왕안석(1021년~1086년)은 송나라의 문장가이자 개혁정치가 이다. 북송시대 인종,영종 신종 시기의 관료였고 시인,

문필가였다.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왕안석은 많은 개혁정책을 내 놓았지만 기존세력들로 부터 배척

당하고 그로인한 당쟁만 심화되었다. 보수세력들은 그의 개혁정책 등은 비판하였지만, 왕안석의 문장에 대해서는

모두 높이 평가하였다.

왕안석은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후 20여년간 화남(華南)에서 지방관으로 재임하였다. 젊은 신종(神宗)이 즉위하고

왕안석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부임하였다. 이때 신종의 신임을 얻어 참지정사가 되어 다양한 개혁정책을 시도했다.

그는 구법당을 몰아 내고 강남출신의 신진관료를 대거 임용하여 신법을 추진하였다. 왕안석은 정치개혁안으로

<만언서>를 인종 재위시 제출하였으나 신종황제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야 재가를 받고 부재상에 오른다. 그는 위로는

관료로 부터 아래로눈 농민 상인, 대지주에 이르기 까지 세수를 확보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부국강병

책으로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 신법으로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개혁법은 사회전반에 걸친 재정개혁이며, 시장을 개혁하고, 소상공인을 보호하며, 군인,

병마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있었다 이법이 지속 시행되었다면 송나라는 외세의 침략도 막아내고 국력은 신장되었을

것이다. 왕안석이 개혁을 시도한 배경은 서하가 국호를 대하로 바꾸어 대규모 침공을 강행하여 7년간의 긴 전쟁을 치

른다. 결국은 화약의 체결로 마무리 되었지만 형식적으로 서하는 송나라에 신하의 예를 치르지만, 송은 서하에 매년

비단13만필, 은 5만냥, 차 2만근을 보내고 화의를 주선한 대가로 거란에도 비단과 은을 제공한다. 

결국은 신하의 예는 무엇인가 해마다 백성들의 고육을 짜야 하니, 이것이 태조 조광윤의 문치정치의 결과이다. 

송나라 건국이념이인 문치주의가 과거시험으로 늘어난 관료임금(공무원)과 개혁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한 간언제도

무관을 무시하고 군인을 양성하지 못한데서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정책만 시도 되었어도 치욕의 외교

는 없었을 것이다. 

◎ 업적

_ 한유

고문운동, 배불론, 인사론(진학해), 유교부흥표리, 문이제도의 실용주의 문학운동전개

_유종원

고문부흥운동, 합리주의사상, 주민복지 : 지방관으로 학문장려, 황무지 개간, 우물을 만듬, 

중국 산문학부흥

_소식

해남 유배지에서 학문을 전파하여 해남최초 과거급제자를 배출임안지사시절 빈한하게 생활

동파육의 유래를 만듬, 임안(항주)지사시절 임안을 더욱 발전시킴 후일 남송의 수도가 됨

고문연구, 고문부흥운동, 뛰어난 서예가, 치수사업에도 뛰어났다. 장강이 범람 할 때 물길만

잡아도 몇 개의 현과 농경지의 유실을 막고, 이재민을 구할 수있다

_소철

구법파로 활동하였으나 중도파다, 고문학자, 고문연구, 춘추.도덕경해석, 유교의 새로운 촉학연구,

_소순

고서의 재해석,  당시대의 문인들에게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켰다, 소식.소철의 아버지로 두아들의

교육에 힘썼다. 뛰어난 문장가

_ 증공

국가의 재정팽창을 염려 재정삭감을 주장, 신법의 지나친 개혁에 반대한 구법파 종래는 중도파였다.

서발(序跋), 잡기(雑記) 류에 우수한 작품이 많다

고문운동을 하였다

_구양수 

고문부흥운동,  역사연구, 저주(滁州)의 자연과 생활을 묘사한 기행산문을 연구썼다 고문, 역사연구로

금석문을 수집하여 <집고록(集古錄)> 을 정리하여 사료편찬에 금속문 활용을 확립- 금석학정리

_왕안석

정치적이상과 구체적 실행을 위한 <만언서>를 작성, 정치폐단 지적, 개혁정치실행, 개혁신법 실시

개혁신법으로 구법당과 대립 반대하는 문인 관료를 배척하였다. 개혁법은 실패로 끝났다. 법치주의

6. 저서, 시,문 

_ 한유

진학해, 한창려집40권,외집(外集)10권, 주요논문 <오원(五原), 원도(原道)>-원(原)은 사물의 본질이다는 이론

시(詩) : 산돌(山石), 좌천되어 남관에 도착하여 질손 상에게 시를 지어 보이다(左遷至藍關示姪孫湘),

_ 유종원

 시(詩) : 강설(江雪), 수필집 : 영주팔기(永州八記), 작품 :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포사자설(捕蛇者設), 

       부판전(蝜蝂傳),  소설 송청전(宋淸傳)

_ 소식

시(詩) : 해남에 가다, 처음황주에 오다, 서호에서 술 마실 때, 막 갰다가 후에 비가 오다,도연명의 <음주>에 화답하다,

             달밤에 살구꽃아래서 나그네와 술을 마시다,봄밤, 남당, 병중 조탑원에서 노닐다, 서림사 벽에 쓰다, 동파,

             한해를 보내다 외 수많은 산문시를 지었다

             사(문학)에도 뛰어나 적벽부를 지어 후대에서 널리 애창하였다.

_ 소철

저서 : <난성집(欒城集)>84권, <난성응조집(欒城應詔集)>12권, 시집<전성시(全宋詩)>

시(詩) : 서호에서 노닐다,

_ 소순

저서 : <기축>,  <권서>, <형론> 등 22권, 예(禮)에 대한 기록으로 평생집필한<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

문집으로 <소로천전집(蘇老泉全集)>,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이유를 적은 책<명자이설> 등이 있다

_ 증공

저서<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書)>, 시, 문집 <원풍유고(元豊類藁)>50권, <속 원풍유고(續元豊類藁)>40권

<융평집(隆平集)>30권, 고전서적(古典書籍)의 재교정과 보전에 노력, 현존하는 <전국책(戰國策)>33편본은

증공이 재 교정한 것이다.

시 : 서쪽누각(西樓), 성남쪽(城南), 하호에 이르다(至荷湖) 등이 있다

_ 구양수

기행산문 <취옹정기(醉翁亭記) : 기행문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문학으로 당나라 한유(韓愈)를 따랐다.

글쓰기에 대한 금언(金言)을 남겼다 :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_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헤아려 생각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교훈이다.

사(詞) 즉 운문에서는 시와 사를 모두 썼다. 시는 만당의 문체를 피하고 성당의 실질에 부합한 시를 썼다.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쓰여진  사 (詞)로 <서호호(西湖好)는 일연은 그 양식을 표준화하여 대중화에 공헌

역사편사 : 신오대사, 신당서

_ 왕안석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례(周禮)> 등을 독창적 해석, 한자의 연원과 제자(製字)원리연구하여

<자설(字設)>을 남김, 문집으로<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遺)> 가 있다

7. 마무리

많이 부족한 글을 마무리한다.

누군가 당송팔대가가 궁금하다면 깊이 있진 못 할 지라도 한번에 비교하고 그업적이 어떤지 행적이

어떠하였는지를 볼 수있을 것이다. 여담이나, 구체적인 부분은 각 문인별로 살펴 보면된다.

계속 정리 해 볼 것이다.

당.송대를 정리하면서 알게 된 것을 정리 한다.

◎ 국가의 존망

_ 내부에서 악재가 닥쳐 망한다_국론이 분리된다

_관료가 어당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사욕을 챙긴다

_무인을 경시하거나, 지나친 힘을 주어 무신으로 해야할 의무를 다 하지 못한다

_당쟁으로 국론이 분열 된다.

_외세의 침략을 막지 못한다.

_외교전략이 책략을 세울 인재가 없다.

◎ 당의 멸망

_황제의 부덕

_안록산의 난, 사사명의 난

_농민들의 난.으로 이미 국가존립을 무너 뜨렸다.

◎ 송의 멸망

_지나친 문치주의

_무신경시로 국방에 힘쓰지 않아 국방력약화

_외교능력이 약화

_지나친 당쟁으로 국론 분열

_언간들의 다툼으로 국력소모

_과거시험의 남발로 관료증가, 재정부담, 재정악화

_굴욕적인 외교로 재정부담과 백성들의 부담증가, 재정악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망국의 길로 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