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당송팔대가 유종원(柳宗元)

by 청송백학 2024. 1. 30.

 

 

1. 개 요

성 명 : 유종원(柳宗元)

자      : 자후(子厚)

시 호 : 문충공(文忠公)

별 칭 : 유유주, 유하동, 하동선생

생 몰 : 773년 ~ 819년

출생지 : 섬서성 운성

시 대 : 당나라 덕종, 순종, 헌종

유종원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사람이다 문풍은 중당시절의 문풍을 따랐으며

한유와는 막역한 사이다. 산문에 능하였고, 개혁정치가였다.

유종원은 문관, 시인, 수필가, 사상가, 고문운동가이다

유종원의 출생의 배경은 당 고종시절 재상이었던 유석(柳奭)의 후손이자 서초(西楚) 황제

의제(義帝)의 후예이다.

또한 조상이 하동사람이어서 유하동(柳河東), 하동선생(河洞先生)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지막의 관직이 유주의 자사(책사)였기에 그를 유유주라 불렀다 그는 장안출신이다.

진나라 이전의  산문인 고문형식을 정리, 연구하여 고문운동에 참여한 문인다.

2. 생 애

773년 장안에서 태어났다.

792년 20세의 나이에 1차 시험인 향시에 합격하여 향공(鄕貢)이 되었고

793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798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하였다. 그는 시험에 낙방한예가 없다.

이후 5년 동안 시험을 보지 않았다. 부친이 돌아가셔서 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유종원도 한유와 마찬가지로 유교를 중히 여겼다.

이 시기에 진사과와 박학굉사과에 함께 합격한 유우석과는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과거시험에 계속 떨어져 천거를 받았던 한유와는 이런 부분이 달랐다.

801년 정 6품 남전위(藍田尉)가 되었다. 

805년 5월 당 덕종이 사망하고 순종이 즉위, 순종은 유능한 인재를 모아 영정혁신(永貞革新)

을 단행하였다.

순종이 즉위하자 왕숙문(王叔文), 왕비(王伾)와 함께 등용되었으며 예부원외랑으로 승진되어

개혁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정혁신은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6개월 만에 끝나고 그에 관여한 많은 인재들이 

죽거나 귀향을 갔다. 이때  개혁에 참가한 유종원, 유우석, 왕숙문, 왕비 등 다수의 문인들이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유우석. 왕숙문 등은 사살되었다 

개혁정치의 내용은 환관과 귀족세력을 쇄신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급진적인 개혁은 기존세력의

거센 반발에 견디지 못하고 끝났다. 그리고 순종은 황위를 양위하였고 그가 당 헌종이다.

805년 유종원은 소주(卲州)의 책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영주사마(永州司馬)로 부임하였다

6개월 후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그때의 심정을 담아 시를 지었다 그 시가 강설(江雪)이다

이 시에는 좌천되었을 때의 슬픔과 외로움을 담아   지었다.

815년 영주의 산수를 유람하고 현지의 사람들과 사귀며 정치, 문화, 철학 등의 학문을 연구한

내용을 다룬 수필 <영주팔기(永州八記)>를 완성하였다. 일종의 기행산문이다.

815년 3월 반대파에 의해 다시 유주로 발령받아 유주자사(柳州刺史)가 되었으며 다시는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819년 47세의 나이로 유주에서 졸(拙)하였다.

3. 업 적

유종원은 마지막 임지였던 유주(柳州)에서 관리로 지내는 동안 노비를 풀어주고 학교를 세워 백성

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였고 또한 황무지를 개간하고 우물을 파는 등 백성들의 삶과 편익을 도모하였다.

가장 큰 업적은 산문학의 부흥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작품으로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포사자설(捕蛇者設)>, <부판전(蝜蝂傳)>이 있다.

<종수곽탁타전>은 나무 심는 일을 하는 곱사등이가 정치를 논하는 이야기이다

<포사자설>은 뱀 잡는  땅군의 슬픈 속사정을 틀어 놓은 이야기이다.

<부판전>은 무턱대고 더 많은 재산과 더 높은 관직을 추구하다 끝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은

관료들을 기이한 습성의 벌레에 비유한 이야기이다.

당나라는 후한시대부터 문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변려문(駢儷文) 형식으로 4자, 6자 대구와 어조사를

포함시켜 7자 대구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음률을 일정하게 배열하여 노래처럼 부를 수 있는 문체이다

형식에 얽매이고 유미주의를 지향하는 문장이기에 사용하는 자가 주로 지식인, 관료들이 사용하였다.

변려문이라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당나라시절 성당시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변려문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시와 문장을 남겼다.

시대적으로 실용주의 문장을 택하여 고문처럼 쓰는 산문을 취하였다는 것이다.

변려문을 배척한 문인들은 유교를 숭상하기에 대부분 유학자였다. 그러나 유학자 역시 문서를 작성함에

변려문체를 사용하였다.

한유와 유종원이 등장하므로 고문연구가 시작되었고 유종원과 한유의 고문운동이 활력을 띄어 송대에

까지 영향을 미치며 더욱 활발해져 현대 중국 수필에 까지 이르렀다

소식, 구양수, 왕안석, 소철, 증공, 소순 등 모두 고문연구를 하였다. 당송팔대가는 모두 변려문체 보다

고문의 산문체를 사용하였다.

한유는 유교 이외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외골수 사상을 소유하였으나, 

유종원은  '비단 유교가 아니어도 올바른 도리를 표한다면 불교든 도교든 괜찮다' 고 하여 한유와는 달랐다.

유종원의 사상은 편협하지 않고 올바른 도리면 된다는 포용적이 사상이었다.

유종원의 저서인 <종수곽탁타전>의 내용

곽탁타가 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자식처럼 소중히 돌본 뒤 이후에는 내버려 둬 나무가 스스로 본성을 다

하도록 해야 비로소 나무가 잘 자라며, 정치를 할 때도 백성들이 본성을 다 하도록 하고 각종 법률과 명령

으로 규제하면 도리어 혼란이 생긴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4. 시(詩)

강설(江雪)

수많은 산에 나는 새는 보이지 않고 ( 千山鳥飛絶 )

수 많은 길에 사람의 발길 끊겼도다.( 萬徑人踪滅 )

외로운 배 위의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늙은이는( 孤舟蓑笠翁 )

눈 오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를 하는도다.( 獨 釣寒江雪 )

 

유주의 성루에 올라 장, 정, 봉, 연 네 주의 자사에게 부치다

(登柳州城樓寄漳.汀.封.連 4州刺史)

유주성 높은 누각에 오르니 먼 세상이 한데 이어졌고

광활한 세상에 내 근심 끝없이 아득하다.

거센 바람은 연꽃 피어 있는 연못을 어지러이 흔들어 대고

줄기차게 내리는 가랑비는 담쟁이덩굴 따라 성벽을 타고 내린다

산꼭대기 나무들이 천 리를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강물은 아홉 번 간장을 도는 것처럼 굽이쳐 흐르고 있다.

문신의 풍속 남아 있는 남만 지역에 함께 왔건만

오히려 각자의 임지에 살면서 소식도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