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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 한유(韓愈)

by 청송백학 2024. 1. 29.

명경지수,호수에 비친 그림자,맑은 마음

1.개 요

성 (명 : 한유(韓愈)

생 몰 : 768년 ~ 824년

자      : 퇴지(退之)

호      : 창려(昌黎)

이 칭 : 한창려, 창려선생

시  호 : 문공(文公)

출생지: 등주(鄧州)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

시 대 : 당나라 중당(中唐)시기 덕종, 헌종

2. 생 애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자 정치가이쟈 사상가였으며 당대의 산문대가였다.

당(唐)대는 시문학이 발달되었다. 그러나 한유와 유종원은 산문을 즐겨 작성하였다.

한유는 문장력으로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올렸다

한유는  등주, 하내군, 남양에서 태어 났다. 그러나 본인은 창려사람이라 자칭하였다. 

오늘날의 하남성 맹주시(河南城, 孟州)이다

본관이 창려(昌黎, 현 하북성 동북부지역)이었기 때문에 본인을 군망창려(郡望昌黎)라

불렀으며 그의 지인들에게도 창려선생(昌黎先生)으로 불리었다. 

한유는 벗이었던 유종원과 함께 당대에 활동한 문장가로서 기존의 시문학 형식을 버리고

복잡한 형식, 화려한 유미주의적인 문장에서 탈피하여 진나라이전의 고문형식으로 

자유로운 문장을 지었다 

한유는 고문(古文)연구를 하여 산문형식의 문장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고문운동의 선구자이다.

한유의 고문연구는 송대에 영향을 미쳐 구양수는 고문연구을 더욱 발전을 시켰다.

구양수는 한유의 글을 좋아하였으며 한유를 추앙하였다. 

한유의 산문은  당대이후 산문형식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유는 당나라 대종(代宗, 대력3년 768년) 때에 지방관리이자 이름난 문인 한중경(韓仲卿)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친이 죽었고, 3세 때  부친마저 사망하였다.

하여 형인 한회(韓會)의 손에 길러졌다. 그러나 당 대종, 대력12년(777년)에 형 한회마저

사망하여 형수인 정씨에 의해 길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유는 공부만이 유일한 위안의 방법이었다.

그 결과 한유는 13세 때 문장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 덕종 정원2년(貞元,786년)에 장안에서 열리는 과거에 도전하였으나 3번을 실패하였다.

정원 8년(792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부(吏部)시험을 치렀으나 실패하였다.

형수인 정씨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르고 정원11년(795년)에 세번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려

순무절도사 동진(董晉) 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고 직위는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이었다.

정원12년(796년), 변주(汴州) 선무군(宣武軍)에서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동진(董晉)을 따라

부임하여 관찰추관(觀察推官)을 맡아 지냈다. 추관을 지내는 동안 시인 맹교(孟郊)와 서로 교류

하였으며 이고(李翺), 장적(張籍)이 그 문하에 들어와 가르쳤다.

동진이 죽은 뒤에 낙양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무령절도사(武寧節度使) 장건봉(張建封)의 휘하에

들어가 절도추관이 되었다

정원16년(800년) 장건봉이 죽자 낙양으로 왔으며 이부시험에 합격하여 이듬해 국자감(國子監)

의  사문박사(四門博士)로 임명되었다. 1년 후 유명한 문장인<사설(師說)>을 지었다.

정원19년(803년)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이때 관중(關中)지방에서 큰 가뭄으로 대기근

이 발생하여 고통받는 백성을 보고 한유는 <어사대상론천한인기장(御使臺上論天旱人饑狀)>,

약칭 <논천한인기장(論天旱人饑狀)>을 지어 당시 경조윤(京兆尹) 이실(李實)의 폭정을 규탄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년 후 그의 조카 노성(老成)이 죽었다. 이때 그가 지은 글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이다.

정원21년(805년) 당 덕종사망으로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으나 당덕종의 사망으로 순종이 즉위했다.

순종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영정혁신(永貞革新)을 시행하였으나 한유는 805년8월에 강릉

군부대로 가기로 하여 개혁에 참여 하지 않았다. 영정혁신이 기득권층의 반발로 새황제를 옹립하여

개혁학자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한유는 그 화를 피했다.

805년 순종은 황위를 양위하여 새 황제가 즉위하였다 새황제는 헌종이다. 헌종은 연호를 원화(元和)

로 하였다.

원화3년(808년)에 한유는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고 몇년 후 <진학해(進學解)>를 지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배도(裵度)는 이에 대한 치하로서 그를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삼았으며 이때 <순종

실록> 집필에도 참여하였다. 

원화12년(817년)에 배도가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로 오원제를 토벌하러 갈 때 동행하여 오원제

토벌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며 이때 <평회서비(平淮西碑)>의 글을 짓는다.

원화19년(819년)정월,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한 헌종은 30년에 한번 열리며 봉양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던 봉상(鳳翔, 섬서성 법문사)의 불사리를 장안에 들여 공양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불주의자인 한유는 원화20년(820년)에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헌종에게 올려  과거

양무제(梁武帝)의 고사를 언급하며  부처를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간언하여 헌종은 크게 노하여

한유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재상 배도(裵度)와 최군(崔羣)의 간언으로 사형을 면하고 조주(潮州,광동성)

자사로 좌천시켰다.

819년 헌종이 사망하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여 다시 중앙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국자제주(國子祭酒, 대학학장)

에 임명되었다. 목종은 연호를 장경이라 하였다.

목종 장경2년(822년)병부시랑, 이부시랑, 경조윤 겸 어사대부의 직을 역임하였다.

이부시랑으로 재임기간이 길었으므로 한유를 한이부로 불리기도 했다.

824년 목종 붕어로 경종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한유는 57세의 나이로 졸(拙)하였다.

사후 예부상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공(文公)으로 받았다.

그리고 북송의 원풍(元豊)연간에 창려백(昌黎伯)으로 추증되었다.

3. 사 상

한유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하였다. 헌종에게 <간영불골표>를 작성하여 

올릴 정도로 불교를 싫어 하였다.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 <불부족신(佛不足信)>"

는 간언을 올렸다.

또한 자신이 맹자(孟子)의 도통(道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였다.

4. 문학에 대한 업적

당시의 문학사조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변려문(駢儷文)이라는 산문형태가 유행했다.

이는 후한(後漢)시대로 부터 비롯되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趙)시대에 크게 발전하고

당나라까지 전해진 글의 형태이다.

글의 표현력과 형식미를 극대화한 유미주의적인 산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글수식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각 구절은 4개와 6개(혹은 어조사를 포함한7개)의 글자로 구성

되어 박자를 맞추고, 대우(對偶,뜻이 같은 글을 나열함)와 대구(對句, 글자모양 혹은 발음

이 비슷한 단어를 배열)를 적극 활용하였다. 오언절구, 칠언절구 등으로 지었다

옛 작품에 사용된 표현을 다시 활용하는전래를 따르며, 각 글자를 음률(성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읊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켜야 할 형식이 너무 많았다.

하여 글쓰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과 표현에만 치중하게 되었으며,

배움의 기회가 적은 사람들은 변려문을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

이런 이유로 상류층만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변려문은 유교의 주장에 따르면 매우 부적절한 산문이었다.

유교에서는 문장이 백성의 교화에 근본을 두고, 나라의 풍속과 관계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학자들 역시 변려문에 익숙하였기에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 풍조는 당나라 중기까지 이어졌다. 이후 다시 형식이 자유롭고 내용을 위주로 한

고문(古文)형식을 사용하자는 문인들이 늘어났다.

그들 중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앞장 선 사람이 한유이다.

한유는 유교의 도리를 산문에 적용하여 문장의 실용성을 강조하며 내용에 올바른

도리만 담겨있다면 운율감, 대구 등의 형식을 배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문이재도(文以載道)라고 한다.

한편으로 그는 유교의 도리만이 올바른 것이라 주장하여 불교(佛敎)나 도교(道敎)와

관련된 내용은 배제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 성품이 끝내 자신의

사상과 문학성향을 온전히 후세에 전하였다.

이후 한자문화권의 문학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한유의 글과 사상을 추종하였다.

현재의 중국에서는 한유의 문장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5. 한유의 저작 

<진학해(進學解)>는 인재등용에 관한 글로써 인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재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한다는 인사이론이다.

진학해의 내용 중 일부

큰 나무는 대들보로 쓰고 작은 나무는 서까래로 쓰며, 기둥 위의 방목, 들보 위의 동자,

기둥 문지도리, 문비도리, 문빗장, 문설주 등도 각기 가장 적합한 재목을 써서 집을 짓는

것이 목수의 공이라 할 수있다.

옥찰, 단사, 적전, 청지 같은 귀중한 약재와 거전초, 마비균, 낡은 북 가죽 같은 흔하고 값싼

약재를 모두 모아 간수하여 처방에 따라 제조할 때 없는 재료가 없도록 하는 것은 의사의

현명함이다.

인재의 등용에 명찰하고 공정을 기하여 능숙한 이나 서툰 이를 아울러 이끌어 주며 중후

하고 재능있는 이를 훌륭하다 하고, 능력이 탁월한 자를 걸출한 인재라 하여 그 장단점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오직 기량과 능력에 맞게 가장 적합한 자리에 쓰이게 하는 것은 재상의

방법과 계략이다 

문집으로 <한창려집(韓昌黎集)>40권과 <외집(外集)>10권이 전해지고 있다.

시인으로서 그는 새롭고 기이한 어구를 많이 사용하는 난해한 시풍이 특징이다.

한유는 백거이(白居易)의 시풍에 맞서 중당(中唐)시단(詩壇)의 흐름을 형성하여

맹교, 장적, 이하(李賀), 왕건, 가도(賈島)로 구성된 '한문(韓門)의 제자'로 통칭하는

제자를을 배출하였다. 

6. 한유의 시 한 수

산돌(山石)

산돌이 어지럽게 널린 오솔길을 지나노라니
황혼이 깃든 절에 박쥐가 날고 있다.
법당 섬돌에 앉아 있으니 막 흡족히 비 내리니
파초잎은 커지고 치자는 살이 쪘다.
스님이 옛 벽의 불화가 좋다 하기에
불을 비추니 희미하게 보인다
상 펴고 자리 쓸고 국과 밥을 차렸는데
앵미밥 넉넉하여 주린 배 채우기 넉넉하다
밤 깊어 조용히 눕자 온 벌레 소리 끊겼고
맑은 달 동산에 떠 올라 달빛이 사립문으로 비쳐 든다
날이 밝아 나 홀로 떠나나 길이 없어
첩첩 안개 속을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한다
붉은 산 푸른 시내가 어우러졌고
소나무와 참나무는 모두 열 아름이나 됨직하다
맨발로 물이 흐르는 돌을 밟고 시내를 건너니
물소리는 철석철석 바람은 옷깃을 날린다
인생이란 이같이 즐길만 한 것이니
어찌 구차하게 굴레에 매일까
아아, 우리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