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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 왕안석

by 청송백학 2024. 1. 26.

송나라 정치가 문필가 왕안석

1. 개 요

이름 : 왕안석 :

생몰 : 1021년 12월 18일 ~ 1086년 5월 21일

자     : 개보(介甫)

호     : 반산(半山)

활동 : 문필가, 개혁신정치가, 시인, 산문가 당송팔대가

추서 : 형국공(荊國公)

시대 : 북송 인종, 영종, 신종

출생지 : 강서성 무주 임천현

                                                                                                       별호 : 임천선생(臨川先生)

2. 생애

왕안석은 북송시대 문필가이자 개혁 정치가이다.

왕안석은 강서성 무주(撫州) .임천(臨川)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농민이었으나 조부(祖父)부터 관직에 나갔다.

그의 부친 왕익(王益)은 평생을 지방관으로 전전했다. 그리고 왕안석이 열아홉이 되었을 때 부친은 돌아가셨다.

왕안석은 고향으로 돌아 가지않고 강녕부(江寧府, 지금의 낙양)에 남았다.

문인으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남겼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나 문재(文才)

로 불리웠다. 유가(儒家) 경전, 제자백가(諸者百家)의 서적, 의서(醫書), 소설 등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그는 <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며 많은 개혁정책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왕안석의 개혁정책은 이론으로 보면 옳은 것이나 기존의 구세력과의 충돌을 초래하여 조정을 분열시켰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지나칠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으로 송나라 조정에 갈등을 초래하여 군사력은 약화되었고

송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남송시대를 열었으나 서서히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개혁정책이 그렇듯 피를 부르는 정책이 될 수도 있다. 국력이 받쳐주고 평화로운 시기에 개혁정책이

서서히 진행되었더라면 성공하였을 것이다.

3. 업 적

왕안석은 같은 고향출신인 증공의 소개로 구양수에게 그의 작품을 제시하여 인종(1022년 ~1063년) 때인 경력2년에

(1042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약 20여년를 화남(華南)

지방에서 각지방관으로 재임하였다.

화남지방관으로 재임 시 왕안석은 관개(灌漑) 사업과 재정(財政) 관리에 뛰어났으며 학문과 행정력을 갖춘 인재로

널리 명성을 알려지면서 중앙관직으로의 진출을 추천받았으나, 집안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사양하였다.

1058년 (가우3년)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실천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작성하여 

인종에게 제출하였다. 

<만언서>에는 당시의 정치적 폐단(弊端)을 지적하고 <주례(周禮, 예를 기반으로 한)>를 전범(典範, 법전)으로 

하는 개혁의 추진을 주장하며 인재양성과 선발을 위한 과거제도의 확대, 국가경제력을 위한 이재(理財)의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비록 채택되지 않았지만 <만언서>는 그의 개혁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문장가로서도 뛰어 나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만언서>의 문장은 모범적인 문장으로 알려졌다.

1963년(가우8년)에 모친이 별세하여 복상(服喪)을 이유로 수년간 강녕(江寧)으로 낙향하여 지냈다.

이때가 인종 말년과 영종의 시기였다.

1067년 영종(英宗, 재위 1063년 ~1067년)의 뒤를 이은 신종(神宗)은 왕안석의 식견에 감탄하여 정치의

쇄신과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요직에 등용하였다.

신종은 왕안석을 강녕부(江寧府, 현 낙양) 지사(知事)로 임명하고, 다시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

로 임명했다.

1069년(희녕2년)에는 그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 신법을 입안하여 개혁정책을 실행케 하였다.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신법을 추진하였다.

왕안석은 1069년 균수법(均輸法)을 시작으로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보마법(保馬法)등의 신법을 연이어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대지주와 호족 등 정부안의 보수파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1074년(희녕7년) 하북(河北)지방에 큰 흉작으로 인한 심한 기근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구법당이

신법시행으로 하늘이 노하였다는 상소를 올리며 반발이 커지자 신종은 왕안석을 강영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좌천시켜 개혁으로 인한 원성을 잠시 무마하려 하였다.     

이듬해인 1075년 다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잃는 일까지 겹쳤다

1076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강녕부로 은거(隱居)하였다. 

은거지가 강녕(낙양)과 종산(鐘山)의 중간에 있었다 하여 반산(半山)이라 하며 왕반산이라 불리웠다

1086년 5월 21일 왕안석은 拙하였다.

사망한 뒤 형국공(荊國公)으로 봉해졌다

왕안석은 유학(儒學)의 실용적 해석과 응용을 강조하였으며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례(周禮)>

등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왕안석은 유학의 도덕주의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법치(法治)'를 강조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이 이유로 왕안석은 유교전통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 구법당

(舊法黨)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여 그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왕안석의 개혁정책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의도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왕안석은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정론(政論)과 여행수기(산문), 시 등을 남겼다.

4. 작품

왕안석의 작품은 현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힘겨운 삶을 시로 묘사하였다

또한  왕안석은 당나라 시인두보(杜甫)의를 높이 평가하여 두보의 시를 학습하였기에 두보처럼

시가 '침울'하다는 평을 받았다

왕안석으로 인하여 송대의 문인들이 두보를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시를 개시(改詩)하기를 즐겨하여 끊임없이 시를 고치는 노력을 하였다.

신법때문에 정치적인 척을 졌지만, 구양수와 소식 등도 왕안석의 문학성을 인정하였다. 

만년(晩年)에는 한자(漢子)의 연원(淵源)과 제자(製字) 원리를 남겼다.

전해지는 문집으로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遺)> 가 있다.

시(詩)는 매화, 초하즉사, 고의, 황하북쪽백성, 명비곡, 강상, 도원행 등 많은 시가 있다.

5. 저서

<만언서>

6. 왕안석에  대한 평가

왕안석은 개혁정치가, 행정가이며, 작품으로 보면 그는 뛰어난 산문가이자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