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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 수의 시를 읽다

by 청송백학 2024. 1. 16.

저주(滁州)를 떠나다 (別滁)

꽃 빛 짙게 무르익고 버드나무는 가볍게 밝은데
꽃 앞에서 술잔 기울이다가 나의 가는 길을 배웅한다
나도 잠시 평상시처럼 취해 보겠으니
현악기 관악기로 이별노래 만들지 못하게 하게

花光濃爓柳輕明   酌酒花前送我行

我亦且如常日醉  莫敎絃管作離聲

 

시인(구양 수)이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저주에서 2년 정도 임직하였다 이때부터 구양 수의

문학적인 성장기로 접어 들었다고 한다

이시는 저주에서 양주태수로 부임하러 가면서 이별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읊은  시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자연의 풍광을 표현한 시지만 실제로는 구양 수의 내적 심정인 외로움과

슬픔을 표현한 시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일 것이다.

이시의 감상은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이 인도하는 대로 이끌리면, 저주의 모든 자연과 시인의 서글픈

마음이 시를 읽는 사람에게 전해 질 것이다.

저주를 떠나기에 앞서 꽃피는 나무아래서 홀로 스스로를 떠나보내는 이별주를 마시며

그동안의 모든 서러움을 잊고 그저 조용히 잔 기울여 취하기를 원함을,

 

 원진에게 장난삼아 답하다 (獻答元珍)

봄 바람이 하늘 끝까지 미치지 못했는지
이월에도 산성에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잔설이 나뭇가지를 짓누르건만 아직 귤은 달려있고
차가운 우뢰소리에 놀란 죽순은 새싹을 돋우려 한다
밤에 북으로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에 고향생각이 나고
병든 몸으로 맞이하는 새해에 들어서니 화려했던 때 생각난다
일찍이 낙양성 아래의 빈객이었으니
들꽃이 비록 늦게 피기로 탄식할 필요 없다

春風疑不到天涯    二月山城未見花

殘雪壓枝猶有橘    凍雷驚筍欲抽芽

夜聞歸雁生卿思    病人新年感物華

曾是洛陽花下客    野芳雖晩不須嗟




시인(구양 수)은 송 인종, 경우3년(1036년), 나이 서른 살에 자신의 정치적인 시련을 맞게 되어 좌천되었다

구양 수는 이릉으로 좌천되어 갔을 때 그의 친구 정보애(丁寶厓)는 협주의 군사판관이었는데 구양 수를 

위로하기 위하여 < 꽃피는 시절에 비는 계속되고,花時久雨>라는 시를 지어 보내자 구양 수가 답시로

위의 시를 지어 답하였다.

이시의 첫연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시인의 서정을 보여준다. 7구의 한탄조로 시를 쓴 것이다.

천애라는 것은 시인의 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릉이라는 벽지로 와서 시인의 마음이 극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즉 좌절한 구양 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후반부의 두구는 앞의 표현과 연계된 표현이다. 벽지로 부임한 시인의 참담한 현실을 나타내었다

후반부의 마지막 두구는  그래도 희망을 가지는 마음을 표시하였다.

낙양성에서도 빈객이었으니 들꽃이 늦게 피기로 탄식할 필요없다는 것으로

본인을 낙양에서 빈객이요, 이릉에서는 들꽃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였다.

 

 

저물녘 악양성에 정박하다(晩泊岳陽)

누운 채 악양성 안의 종소리를 들으며
배를 악양성 아래 나무에 매었다
때마침 텅 빈 강 위로 밝은 달 찾아 오니
구름 낀 강 아득하여 강 길을 잃어버렸다
밤 깊어 강 위 달은 푸른빛을 발하고
물 위의 사람은 노래 부르며 달빛 아래서 돌아간다
곡조 한 번 끝나는 소리 길어서 다 듣지 못했는데
가벼운 노는 짧은 노로 나는 듯이 가 버렸네

 

적당한 시어의 배열로 나그네의 심정을 잘 노래한 시이다.

1연의 성안과 성아래로 배치하여 공간을 만들었고, 시인은 성안으로 들어 가지않고

성아래에 배를 정박하고 배위에서 한가로이 누워 즐긴다.

이시는 당나라 이백의 시<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다,早發白帝城>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이시는 구양 수의 대표작에 속한다 

 

왕안석의 <명비곡>에 화답하는 두 수
和王介甫明妃曲二首
(一)
오랑케들은 안장달린 말을 집으로 삼고
활쏘기와 사냥을 풍속으로 삼았다
단 샘물과 기름진 풀밭은 일정한 곳이 없으니
놀란 새와 짐승을 다투어 달려가 쫒는다
누가 한족 딸을 오랑캐 자식에게 시집보냈는가
모래바람 무정하나 얼굴은 백옥 같은데
가도가도 한족은 만날 수 없고
말 위에서 고향 그리는 노래를 짓네
손을 앞뒤로 움직여 비파를 타면 '비'와 '파' 소리가 나고
오랑캐들도 함께 들으며 또한 탄식한다
옥 같은 얼굴이 하늘 끝에서 떠돌다 죽었건만
비파곡은 오히려 한나라 왕실에 전해졌다
궁궐에서는 다투어 그녀의 새 노래를  타니
남긴 한 이미 깊어 소리 더욱 드높다
가녀린 손의 여인 규방에서 자라
비파 배웠으되 마루에서 내려온 일도 없었네
원누런 구름이 변방 길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 소리가 애간장을 끊을 줄 알까



명비는 한나라의 왕소군을 말한다  한 원제의 후궁이었으나 흉노가 침입하였을 때 흉노의 호안야선우에게 바쳐졌다.

왕소군은 말 위에서 비파를 타며 흉노로 향하였는데 호안야선우가 죽자 그의 아들을 받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2부종사를 한 것이다

한족으로서는 치욕적이나 당시에는 힘으로 막지 못할 때는 공물을 바치며 그때 화친의 뜻으로 황제의 자녀나 궁중 여인을

바쳤다. 사실, 왕소군은 중국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중 한명이다

뛰어난 지혜로도 알려져있으나 당시 한 원제는 왕소군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많은 후궁들 중의 한명이었을 뿐이다. 미쳐 살펴 볼 차례를 놓쳤거나

이시는 구양 수가 53세이던 가우4년(1059년)에 지은 시로 왕안석의 <명비곡> 2수에 화답한 것 중 일수이다

당나라에서는 백거이, 저광희, 양릉 등이 왕소군에 대한것을 시의 주요 제재로 하여 글을 씃었다

이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과 제왕의 어리석음을 노래한 시다

풍락정에서 봄을 즐기다
豊樂亭遊春

붉은 나무 푸른 산에 해 지려 하는데
넓은 들녘 풀빛의 푸르름은 끝이 없다
행락객은 봄이 저물러 감을 괘념치 않고
풍락정 앞을 오가며떨어지는 꽃잎을 밟는다

안휘성 저주에 있다 풍락정은 구양 수가 지주(知州)에 있을 때 세운 정자이다 

풍락정 주위의 경관은 사계절 모두 뛰어났지만 구양 수는 그 중 봄경관을 세 수로 노래하였다.

이시는 그중 세번째 시이다 잘 알려진 작품이며 봄을 연연하는감정을 잘 묘사하였다

전반 두구는 풍락정 주변을 노래한 시이고 후반부 두 구는그곳을 행락객이 오가며 즐긴다는 것으로

봄의 색을 홍색,청색녹색으로 잘 나타내었다.

어떤 아름다운 자연이든 그곳에 사람이 함께 있어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