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당송팔대가 구양 수

by 청송백학 2024. 1. 15.

당송팔대가 구양수

1. 개   요

이름 : 구양 수(歐陽 修)

작위 : 초국공 (추증)

시효 : 문충(文忠)

생몰 : 1007년 ~1072년 

출생 : 길주 여령현

성씨 : 구양(歐陽)

이름 : 수(修)

자    : 영숙(永叔)

호    : 취옹(醉翁)

주군 : 송 인종, 송 영종, 송 신종

시대 : 북송

 

2. 생애

  구양 수(歐陽 修, 1007 ~ 1072)는 중국 송나라 인종~신종때의 정치가. 시인. 문필가. 역사학자이다.

자는 영숙, 호는 취옹. 육일거사이다.

시호는 문충으로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그 이름을 남겼다.

태어난 곳은 길주(吉州) 여령현(廬陵縣, 장시성 지안)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4살 때 사천성

지방관이었던 부친 (구양 관,歐陽 觀)을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를 따라 백부가 추관(推官)으로 있는 수주(隨州)로 가서 빈궁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가세 때문에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구양수는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당나라 한유의 깊고 예리한 문장에 매력을 느끼고 추앙하였다.

1023년 17세 때 수주(隨州)의 지방고시에 응시했지만, 그의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 는 이유로 실패하였다.

그 후 1028년 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 주었다. 서언은 구양 수의 웅대한

문장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 들였다. 그해 겨울 구양 수는 서언과 함께 경사로 가서

춘계국자감고시 (春季國子監考試)에 응시하여 수석을 하였으며, 가을에는 국학(國學)에 응시하여

또 수석을 하였다.

1030년 천성 8년에 스물 세살때 진사에 급제하여 고관으로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독학을 하여 가꿔진 그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성격은 관직 내내 남아 있었다.

그후 관각교감(館閣校勘) 등을 역임하였다. 1036년(경우3년) 개혁파 범중엄을 월권하며 변호

하므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이간에 의해 이능(夷陵)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034년 인종은 언로(言路)를 확장하려고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 수 등을 지간원(知諫院)

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 수는 경사(京師)로

돌아 온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으로 복귀하여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의 신임을 잃었고 1045년(경력5년)에는 비방(誹謗)당하여

안휘성지사로 또 좌천되었다.

몇 년 후 다시 한 번 중앙에 권지례부공거 로 복귀해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054년 구양 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여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하였다. 

1057년(가후2년) 권지례부공거(權知禮部貢擧)에 올랐으며 1058년에는 포증(판관 포청천)에

이어 개봉부 부윤(府尹)에 임명받아 과거를 감독하여 소식(소동파)을 발굴

하였다. 이때가 송 신종 때였다. 당시 구양수의 반대파는 소식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껴 각종

구설수와 모함을 하였으나 구양 수는 경사에 지속하여 머물며 < 당서 > 편찬에 참여하며

한림학사겸 사관수찬( 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한다. 

그 후 추밀부사(樞密副使) . 참지첨사(參知政事, 부재상)오르고 소순 . 왕안석 등을 기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지지했지만 실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을 대상으로 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가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1072년 송 신종, 희녕2년에 은둔생활을 하면서 영주(현 안휘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 수는 66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2년 후에 조정에서 시호로 ' 문충(文忠) '을 내렸다.

문충은 구양 수가 일생 당성한 문학과 관련된 업적으로 시호가 하사되었다.

소순, 소식, 소철 도 사후 문충으로 그 업적을 기렸다.

 

3. 업적

독학을 하였으나 문학에서 뛰어 났다

산문에서는 당나라의 학자인 한유의 예(例)를 모방하였고, 고문부흥운동을 추진하였다.

저주(滁州)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 취옹정기,醉翁亭記 >는 유명한

산문 작품이다. 그리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글쓰기에 대해 간다(看多), 주다(做多), 상량다(商量多)라는 금언을 남겼다.

우리나라 한국어 어순에 맞게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으로 알려졌으며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헤아려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사(詞)는 운문으로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하였으나, 자랑하지 않으며 재미있게 쓴 작풍이다.

시는 만당(晩唐, 당나라 말기)의 현란한 문체를 피하고, 성당(盛唐, 부흥기의 당나라)의 실질에

부합하고 강건(剛健, 강하고 힘찬)한 위풍(威風, 위엄있는 시풍)을 따랐다.사의 경우 특히 채상자

(采桑子, 뽕잎 따는 사람 - 한나라의 시에서 유래)를 위해 만들어진 사(詞)인< 서호호(西湖好) >

일련은 그 양식을 표준화해 사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구양수를 유학과 밀접하다고 생각해서 '개인에 괸계된 것보다는 

사회에 관계된 것'에 경직되고 긴장된 것, 건설적인 것에 무게를 두었다.틀린 것은 아니나 ,

구양 수의 시문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또 다른 해석을 할 수있다.

구양 수는 배경도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고 성공하여 조정에 중임되었으니 상식과 지식으로 본다면 

부족함이 없으나, 그의 내면에는 분명 아쉽고 외로운 마음, 그를 견제하는 조정에서 입지하기 위한

노력과 그의 힘든 마음이 시나 사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뛰어 난 작품으로 평가하기 보다  그의 조정에서 삶, 곧고 고집스런 그의 행동으로

평가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가로서 구양 수는 지방 근무 중에 , <신 오대사>를 편찬하였다.중앙에 복귀한 후 송기 등과 함께

<신 당서>를 편찬하였다. 당시에 이것은 유명한 경서학자였던 류창(劉敞)과 같이 작업하여 범례를

찾게 만들어진 것으로 춘추 학문상 색채가 강하고 근엄한 양식을 견지한 책으로 평가되었다. 

금석문 수집을 좋아하여 <집고록, 集古錄>을 정리, 사료를 편찬하는 방법으로 금석문의 활용을 확립

하는 송(宋)대의 역사기록 수법(특히 금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著書) _

<구양문충공전집,歐陽文忠公全集>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들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정리되었다.

4. 여담

송 나라 인종시절을 배경으로 한 <청평악>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당시의 궁중의 암투는 버리고 

조정인물들의 등용과 좌천, 유배, 업적 등이 나온다. 구양수, 범중엄, 여이간, 소식, 왕안석외에도

다수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드라마이니 70~80%정도면 잘된 것이고 이해를 도울 것 같다.